한 굴의 오소리
주인공의 굴욕. 유희왕 GX 오타쿠 글.
유희왕 GX 애니에 대한 오타쿠 글. 트위터에서 수시로 반복하는 말의 간략한 정리이다.
4기 초, 158화, 아닌 저녁에 불려서 영문도 모르고 화산까지 땀을 삐질대며 걸어온 쥬다이는 헬기를 타고 날아온 카게마루, 사이오와 재회한다. 분기별 악당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이 소위 ‘악당 정모’ 장면을 나는 엄청나게 좋아한다. 일단 나쁜놈들이 한 자리에 옹기종기 모인 꼴이 웃기다. 그 모인 이유가 자기네들이 한 나쁜짓의 여파를 뒷수습하기 위해서란 지점은 더 웃기다.
가장 웃긴 건 그 나쁜놈들 모임에 주인공이 껴있고, 심지어 그 주인공이 구성원중에서 가장 나쁜놈이고, 주인공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런데 그것을 싫어하고 있다는 지점이다.
……
카게마루: 쥬다이 군, 자네에게 부탁이 있다.
쥬다이: 부탁? 유감이지만 난 아까 전에 자퇴서를 낸 참이었거든.
사이오: 뭐라고?
쥬다이: 난 이 섬을 떠날 거야. 부탁이 있다면 다른 녀석한테 해. 용무가 그뿐이라면 난 돌아갈게.
카게마루: 기다려라, 쥬다이 군! 자네는 지금 일어나는 사태를 자신 혼자만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만, 그건 틀렸다.
쥬다이: 그게…… 무슨 말이야?
사이오: 계시야. 불길한 예감이라는 거지.
……
사이오: 난 이미 미래를 보는 힘을 잃었어. 하지만, 그럼에도 돌아온 계시를 확인하기 위해, 난 급히 카게마루 회장님께 연락을 해, 뭐가 일어나려고 하는지 조사를 부탁했다.
카게마루: 사이오 군에게 연락을 받고 나도 놀랐다. 왜냐하면 나도 그와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쥬다이 군, 자네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렇기에 자네는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해 이 섬을 떠나려고 한 거다.
쥬다이: 뭔가 알고 있어?
카게마루: 내 조사 팀은 이 섬에 어떤 힘이 분출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건 지반의 틈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것과 같은, 말하자면 자연현상과 같은 거대한 힘이다.
사이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카게마루 회장님의 삼환마 부활, 내 빛의 파동 일, 그리고 네 유벨 사건.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이 섬을 중심으로 한 차원에 부하를 일으켜 새로운 사태를 일으킬 것 같아. 바로 그렇기에 우리 3명에게 계시가 있었던 거다. 쥬다이, 지금 네가 떠난대도, 곧 찾아올 사태가 이 섬에서 없어지진 않아.
카게마루: 이건 우리가 듀얼 몬스터즈를 악용한 업보일지도 모르지. 쥬다이 군, 자네가 이 사태를 수습해 주었으면 하네.
쥬다이: 우리는 한 굴의 오소리(同じ穴のムジナ)니까, 나한테 전부 뒷수습을 시키겠다는 거야?
카게마루: 그런 말에 반박하기는 힘들지만,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껏 이 꼴. 자네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다.
사이오: 쥬다이, 나와 회장님은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어. 넌 인지를 초월한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고독하고 동료들과 떨어져 이 섬을 떠나고 싶은 거다. 기분은 잘 안다. 하지만 이건 너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사명이다. 넌 그걸 내팽개치고 동료들을 내버려 두고 섬을 떠날 순 없어. 난 잘 알고 있어. 그것이 설령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해도 변할 수 없는 쥬다이, 너 자신의 본질이란 걸. 우리들은 네가 무사히 동료들과 함께 이 학원을 졸업하길 바라고 있어.
쥬다이: 말은 잘하네…….
……
왠지 서로 연락하고 있고 친해보이는 1기와 2기 보스들, 자연스럽게 쥬다이를 유벨 사건의 책임자로 편입시키는 그들의 “네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알고 있어”, 그렇게 “듀얼 몬스터즈를 악용”해서 “업보”를 치러야 하는 주인공, “동료도 뭣도 아니면서” “쥬다이 잘알인 척”하는 사이오 등등, 재밌는 지점이 너무 많다. 대사 하나하나가 코미디가 따로 없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듯 악당 정모 최고의 백미는 역시 우리의 주인공 쥬다이의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쥬다이 이 녀석……, 악당들에게 멋대로 동료 취급 당하는 것에 무지 떫어하고 있다. 근데 자기 생각에도 지가 나쁜놈 맞아서 부정도 못하고 그냥 나 떫다고 티내는 것밖에 못 한다. 최고다.
위의 발췌에서 강조되었던 대사, “우리는 한 굴의 오소리(同じ穴のムジナ)니까, 나한테 전부 뒷수습을 시키겠다는 거야?”가 기억에 없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일부러 못 알아들으라고 일본어 관용구를 번역하지 않고 문자 그대로 옮겼다.
국내에서 이 대사는 주로 인터넷에 퍼져 있는 해적 자막들의 번역으로 알려져 있을 듯하다.
- “우린 같은 처지인데, 제게 다 떠넘기려는 겁니까?”
- “우린 한 배를 탄 꼴이니까… 나보고 다 하라고요?”
각각 다른 자막인데, 같은 대사지만 뉘앙스가 각각 다르다.
전자는 ‘책임은 모두에게 있는데 왜 나만 수습을 해야 하냐’라는 항의라면, 후자는 ‘어차피 내가 도망 못 갈 상황이니까 나한테 편하게 다 떠넘기겠다 이거지’라는 냉소다.
하지만 원 대사의 뜻은 이렇다.
同じ穴のムジナ(한 굴의 오소리)
겉으로는 관련이 없어 보여도 실제로는 동류, 동료인 것의 비유. 많은 경우 악행을 저지르는 사람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 직역하면 이런 말이 된다는 거다.
“우린 악당 동지니까, 나한테 전부 뒷수습을 시키겠다는 거야?”
쥬다이가 하려고 했던 말은 주인공 독박 전개에 대한 불평 불만이 아니다. 이건 자조다. 그의 진짜 요점은 자기가 악당 녀석들과 동료, 동급으로 추락했다는 지점에 있다. 이제 나는 악당이니까. 저 녀석들이 ‘그런 거’(뻔뻔하게 수습 떠넘기기)를 시킬 수 있는 동료니까. 그리고 상당히 직설적인 불편감의 표시이기도 하다. ‘아 그래, 나도 이제 늬들과 똑같은 나쁜놈이라 이거지’.
그도 그럴 게 쥬다이는 진짜로 나쁜놈인 것이다. 쥬다이 본인이 생각해도 말이다. 심지어 거기 있는 나쁜놈들 중에서 가장 나쁜놈이다. 만 단위로 사람을 죽인 패왕이면서 12차원을 멸망의 위기에 몰아넣었던 수괴 유벨과 한몸이 된 인간이 도대체 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카게마루와 사이오는 지구에서만 놀았다. 그러게 착하게 살았어야지!ㅋㅋㅋ
이후의 흐름도 정말 웃긴다. 다른 때도 아니고 쥬다이가 너네 불편하단 티를 낸 직후에 사이오가 한다는 말이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나는 알아~ 이러는 정신분석이란 말이다. 당신 쥬다이와 아무 관계도 아니었잖아, 왜 친한 척? 당신이 뭘 안다고!? 하지만 사이오는 아는 거다. 왜냐하면…… 악당 동지니까! ^^ㅎ
쥬다이가 괜히 헛웃음을 터뜨린 게 아니다. “말은 잘하네…….” 실로 158화는 쥬다이 굴욕의 연속이었다.
올해 초 GX에 재입덕해서 다시 정주행하고 나서야 한 굴의 너구리란 관용구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그 전까지는 그냥 쥬다이가 독박에 항의하는 대사로만 막연히 알았다), 그 이후로 쥬다이에 대한 해석이 완전히 뒤집혔다. 파면 팔수록 재밌는 녀석이다. 이래서 인생 최애캐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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